한강에 사과꽃이 피었다
지난달, 창밖 사과나무에 여남은 개의 열매를 남겨둔 채 수확을 마쳤다. 여름 내내 숲을 가로지르던 새들을 위한 나의 작은 배려였다. 혹여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날개들이 겨울 허기를 달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비가 멎은 오후 마당에 나서면 정적만이 고여 있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간이 침묵 속으로 흐르는 동안, 가지 끝에 매달린 사과 한 알은 지난봄 아름답게 피었던 사과꽃의 기억을 놓지 않으려 끝끝내 매달려 있었다..
속내를 드러낸 가지들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 모습은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채, 낯선 땅의 차가운 겨울 앞에 서서 그리움 가득한 두 팔을 애틋하게 고향을 향해 뻗은 이민자의 형상과 닮아 있었다. 수십 년을 견뎌온 시간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분의 얼굴이 겹쳐진 것은 아마도 그분을 향한 그리움이 아직 내 안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은 ‘샌님’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단정한 옷매무새처럼 깔끔한외모에, 느리면서도 온화한 말투가 늘 배어 있었다. 말끝을 세우는 법이 없었고, 걸음을 옮길 때조차 주변을 먼저 살피던 분이었다. 연방 사회보장국 사무소나 병원에 가실 때 영어 통역을 도와주며 우리는 한국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가까워졌다.
초인종을 누르면 “Who is it?” 대신 언제나 “누구세요?”라는 정겨운 물음이 돌아왔다. 문턱을 넘는 순간, 시간은 거꾸로 흘러 한국의 어느 거실에 닿았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 년 세월의 손때가 묻은 한영사전과 광고까지 꼼꼼히 읽었을 듯한 한국 신문이 놓여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에는 누렇게 바랜 <목민심서>에서부터 대하소설 <토지>와 <태백산맥>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한국 문학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사과나무와 대추나무, 감나무가 어우러진 아담한 정원은 영락없이 한국의 시골집을 떠올리게 했다. 청포도 넝쿨 아래 조그만 정자를 지어 캘리포니아의 한낮 뙤약볕을 식히던 그분과 아내는, 해마다 손수 청포도 와인을 빚어 지인들에게 고향의 손맛을 선물하곤 하셨다.
거실 TV에서는 늘 한국 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귀가 어두운 아내를 위해 그분은 때론 정치 평론가가 되고, 때론 기상캐스터가 되어 고국의 소식을 중계했다. TV 화면에 한강 전경이라도 나오면 급히 아내가 앉아 있었던 휠체어를 돌려 세우며 “저기 보구려” 하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흑석동의 언덕에 사셨다고 했다. 언덕을 따라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그리고 자주 가셨던 재래시장이 그립다고 하셨다.
부부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한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민주화 시위에 나섰다가 제적을 당한 큰아들의 앞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평생 공무원이었던 그분은 쉰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 이민자가 되었다. 언어의 장벽 앞에서 그분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온전히 몸을 써야 하는 노동뿐이었다. 정원사가 되었고, 빌딩을 청소했고, 수영장의 바닥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손에 쥔 생업은 신발 수선이었다. 한때 펜을 잡던 고운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지만, 성실하고 꼼꼼한 손길 덕에 가게는 차츰 입소문을 탔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아내도 옷 수선을 거들며, 부부는 비로소 이국땅에 조심스레 뿌리를 내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운명은 가차 없었다. 노부부의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의 칼날은 아내를 지키려 몸으로 맞선 그분의 몸에 열여섯 군데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고달픈 이민의 시간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안정된 삶을 향한 꿈은 그날 산산이 무너졌다. 상처 사이로 통증만이 아니라 공포와 혼란이 스며들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서서히, ‘치매’라는 이름의 지우개가 생겼다. 마치 그날의 공포를 붙잡아 둘 수 없어, 기억이 스스로 물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하얀 도화지처럼 변해가고 있어.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만 같아..”
치매 전문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 안부를 묻는 전화선 너머로 아내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안에 노망난 사람은 없었다”는 아내의 말은 현실을 부정하는 외침이자, 혼란 속에 있는 남편의 정신을 예전처럼 돌려 놓고 싶어 하는 절규처럼 들렸다.“우리 애기 엄마 어디 갔어요?” 베개를 아기라 부르며 젊은 시절의 아내를 찾는 남편을 바라보는, 육십 년을 함께 살아온 늙은 아내의 가슴은 얼마나 깊이 무너져 갔을까.
지쳐가는 아내를 위해 어느 주말, 나는 그분을 모시고 나들이에 나섰다. 운전대를 잡고 곁눈질로 바라본 그분의 얼굴에는 타국에서 견뎌온 수십년의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주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 한강이다!”
갑자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그분이 외쳤다. 메마른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뉴 포트 도시 변두리에 흐르는 실처럼 가는 개울이었다. 개천 복개 공사가 한창인 그 초라한 물줄기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한강에 또 다리를 놓나 보네!” 치매는 그의 현재를 지워버렸지만, 고향을 향한 뼈저린 그리움만은 끝내 뺏어가지 못했다. 그 작은 실개울은 그분의 마음속에서 흑석동을 따라 흐르는 푸른 한강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분은 사과나무에서 꺾여 떨어진 가지처럼 조용히, 그러나 외롭게 먼 길을 떠나셨다. 임종의 자리에서 힘겹게 새어 나오던 숨소리는, 젊은 날 한강을 가로질러 헤엄치며 내뿜던 마지막 숨결을 떠올리게 했다. 이국의 낯선 방에서 생의 끝자락을 맞이하는 일이 어찌 그분만의 이야기이겠는가. 그것은 고국을 떠나온 우리 이민자들이 언젠가 맞닥뜨릴지도 모를, 익숙한 마지막 장면일지 모른다.
잎을 모두 떨군 채 사과 한 알을 품고 서 있는 저 나무처럼, 우리 또한 가장 소중한 그리움 하나를 가슴에 매단 채 저 깊은 잠의 강을 천천히 건너 가야 할지도 모른다.
사과 꽃이 피는 한강은 가끔 내 눈에서 흐른다.
1-5-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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