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 · 단상 게시판

페이지 모서리를 잡고 드래그하거나, 화살표·스와이프로 넘기세요

2026

단상 작품집Notes Anthology

한국작가회의 미주지회

Writers Association of Korea — USA Chapter

수록 작품 5

단상 · 1

너에게 내린 나의 닻

정 효순

Artist; Hyosoon Jung Title: Seattle Story 32. Where we are… Medium: Oil on linen canvas Size: 116.84 x 76.2 cm Inspired by a pfoto by @ysj_insta 긴 항해 끝에 나는 너의 이름 앞에 닻을 내린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떠밀리지 않는다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 흔들려도 괜찮다는 침묵 속에서 시간은 천천히 숨을 고른다 떠남을 배운 배가 비로소 머묾을 배우는 순간, 그곳이 나의 정박지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Where we are…

단상 · 2

비가 내린다

정 효순

Artist: Hyosoon Jung Title: Seattle Story 43. RainRainRain… Medium: Oil on lines canvas Size: 28 x 22 inch 2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비가내린다 말없이 오래된 친구처럼 창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그저 곁에 와 앉아있는 것 처럼… 비는 묻지 않는다 왜 여기 있는지 다만 같이 있어준다… 거리의 불빛은 번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금 더 느려진다 비가 내린다 급하지 않게 내린다 쏟아지기 보다 쓰며들고, 소리치기보다 속삭인다 우산을 펼치게 하기보다는, 그냥 어깨에 내려앉는다 비는 모든 것을 조금씩 흐리게 만든다 건물의 윤곽도, 마음속의 경계도 슬픔도 선명하지 않고, 기쁨도 요란하지 않게한다 비소리가 하루의 결을 바꾸는 조용한 리듬으로 들린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비를 피하지 않는다 그저 그 안에서 걷는다 커피를 들고, 생각을 품고 비에 젖어 어쩌면 무언가를 놓지 않고 살아가듯… 기억들을 데리고 온다 이민 첫해.. 눈물과 빗물이 구별되지 않았던 그해… 슬프게도 자주내렸고 불안으로 젓게했고 무서운 사람이 살고있는 TrailerHouse 밖에는 빗물이 고여 구두 밑창으로 축축한 습기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 젖은 거리 위로 빛이 번져 세상은 다시 천천히 윤곽을 되찾는다 나는 그 틈에서 작게 숨을 고른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고, 이 도시는 말해준다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창가에 맺힌 물방울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 힘으로…

단상 · 3

골목에서 걷는 기억

정 효순

Artist: Hyosoon Jung Title: Seattle Story40. 7080 Medium: Acrylic with Charcoal on linen canvas. 7080 세대의 시간은 마치 오래된 바람결 위에 얹힌 노래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게 흐릅니다. 청춘의 골목을 달리던 날들이 이제는 마음 안쪽에서 은은히 빛나고, 가난도, 웃음도, 잃어버린 꿈도 모두가 삶을 지탱해 준 보석처럼 서랍 속에 고이 놓여 있습니다. 어깨를 스치는 겨울빛조차 그분들의 걸음 앞에서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세월에 깎여 둥글어진 손끝에는 젊은 날의 뜨거움과 아끼며 살아낸 인생의 온도가 아직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7080 세대는 소박한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작은 말에도 마음을 기울이며, 누군가의 하루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지금 이 시대를 조용히 지켜주는 우리의 깊은 뿌리입니다. 우리들은 그날을 기다리며 많이도 뛰었습니다,. 채루탄 연기가 눈을 막아도 마음의 눈은 열려있어습니다. 젊었던 우리는 강인했습니다. 오늘도 그 세대가 쌓아올린 시간 위에 우리는 다시 희망을 배웁니다. 흘러간 날들을 품고도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분들의 마음에서— 세월의 품격과 삶의 고운 결이 피어납니다.

단상 · 4

산책이었으면

김 명주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도 모른다 옛날 남의 논을 가로질러 다니는 사람들을 논의 주인이 길을 막았다 가로지르면 5분 거리가, 길을 따라 걸으면 30분은 걸리는 길을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30분 걸리는 길을 걷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첫 걸음도 쉽지 않았는데 발에 채인 돌이 깊이 박힌 것인줄만 알았던 헛걸음도 겨우 지난다 발톱에 든 멍 지금은 짙게 푸르지만 조금 지나면 옅은 보라색으로 될 것도 안다 그것도 잊을만 하면 아픔은 벌써 지나있으리라 신발 끈을 내려다 본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서두르는 시간으로 다시 조여 매어야 하는가 보다.

단상 · 5

탑골 공원

리허설

걸어 가는 길 파고다 공원이 지나갑니다 주름 가득한 지팡이 의자마다 먼 산을 두리번거립니다 모자를 깊이 쓰고 마스크를 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그림자가 먼저 걸어옵니다 곁에 잠시 머문 귀엣말 하얀 스티로폼 컵에 믹스커피가 향기로 담깁니다 부드럽게 장갑을 낀 봄이 컵 안에서 돌고 있습니다 쉽게 식는 아침이 종이컵에서 말라가고 점심이 줄을 섭니다 국물에 말은 햇볕 젓가락에 집혀 미끄러집니다 500원 색 바랜 주머니 속 손 끝에서 만져집니다 탑골 팔각정 지붕보다 깊은 단청의 색깔보다 구겨진 온기가 꼬물거립니다. ———— 한 늙은 남자의 걸음을 보며 마음이 덜컹거렸다 걷는 것이 아니고 땅을 끌고 다녔다 저 늙은 남자는 얼마나 먼 길을 돌아 탑골공원의 걸음을 끌고 다니는 것일까? 500 원을 주고 커피를 사는 외로움에는 아마 치열하게 살던 옛날이 댓가로 추억이라고 했다

한국작가회의 미주지회 · 2026 단상 작품집 (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