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 · 수필 게시판

페이지 모서리를 잡고 드래그하거나, 화살표·스와이프로 넘기세요

2026

수필 작품집Essay Anthology

한국작가회의 미주지회

Writers Association of Korea — USA Chapter

수록 작품 3

수필 · 1

마지막 안부 전화

김민정

띠리링 링링~ 띠리링 링링, 신호음만 빈 공간을 맴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여보세요, 아, 민정이가?” 금 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던 엄마의 반갑게 다가오던 목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만이 선을 타고 흘러나올 뿐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세 달쯤 지났을 때였다. 퇴근길 도로 위에서 느닷없이 그리움 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울다가, 나도 모르게 익숙한 번호 를 눌렀다. 엄마집을 정리하던 동생이 차마 엄마의 전화개통을 해지하지 못했다는 것 을 깨달았을 때 가슴이 아려왔다. 전화선마저 끊어버리면 이 세상에 엄마가 살았었다 는 마지막 흔적마저 영영 지워져 버릴 것 같았으리라. 그 번호가 남아있는 한, 신호음 이 울리는 동안만큼은 엄마가 여전히 그곳에 계시다고 믿고 싶었던 동생의 애달픈 마 음이었을 것이다. 끊어진 줄 알았던 우리의 탯줄이, 수화기 너머의 무음 속에서 여전 히 전화선이 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거의 매일 퇴근길마다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대화에는 늘 정 해진 순서가 있었다. 하루 사이 별일이 없었음에도 엄마는 언제나 나의 안부를 가장 먼저 챙겼다. 이어 하나뿐인 외아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큰딸에게는 “이제 여 행은 그만하고 시집갈 생각은 안 하나?” 막내가 운전학원에 다닌다 하면 “그 꼬맹이 가 뭘 안다고, 조심시키래이” 하며 걱정을 얹으셨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나의 단조로운 일상이나, 시골에서 한적하게 지내는 엄마의 하루 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통화는 끝이 없었다. 내가 집에 도착할 즈음 통 화의 끝은 늘 작은 실랑이로 마무리되곤 했다. 끊긴 전화선 너머로 밀려올 정적과 허 전함을 상대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하나, 둘, 셋을 세 고 동시에 전화를 내려놓기로 합의하곤 했다. 내일 다시 걸 통화라는 걸 알면서도, 그 렇게 전화기에 의지해 몇천 마일의 아득한 거리와 몇광년 같은 시공간을 메우려 애썼 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애틋했던 것은 아니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생업에 매달리던 시절, 엄마의 모습은 차라리 무뚝뚝함에 가까웠다. 말이 없던 엄마는 당신 키보다 길 쭉한 도마 앞에 서거나 연탄 아궁이 네 개를 부지런히 오가며 음식을 만드셨다. 아궁 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엄마의 얼굴엔 땀방울이 끊임없이 맺혔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 온 힘을 쏟아내던, 엄마의 가장 치열했던 날들이었다. 어릴 적 나는 세 살 터울 동생을 데리고 마을 뒷산에 있는 향교의 큰 바위에 누워 숙제 를 하곤 했다. 해 질 녘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여전히 묵묵히 말씀 하시곤 했다. “배고프제?” 그 짧은 말이 그 시절 엄마가 가진 압축된 사랑의 표현이 었다. 언젠가 안부 전화를 하다가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엄마, 우리가 어릴 때 엄마는 참 말이 없었어. 잔소리 들은 기억도 별로 없고.”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서너 시간 자는 것도 감지덕지하며 살았으니까. 그 리고 잔소리할 게 뭐 있었겠나. 에미 고생하는 거 보고 자식들이 어떻게든 짐이 안 되 려고 애쓰는 게 다 보였는데. 미안해서 말도 선뜻 못 나왔지.”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엄마가 덧붙이셨다. “고맙다. 내가 수고한 것보다 너희가 더 애썼다.” 엄마는 '엄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자식을 세상에 태 어나게 했으면 부족함 없이 키웠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부채감이었다. 타국에 건너와 아이들을 키우며 늘 서툰 엄마로 살았던 나 역시, 이제야 비로소 그 마음을 이 해한다. 나 역시 내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사는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자식의 인연이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서로 보듬으며 견뎌내는 운명적 인 수용일지도 모른다. 2016년 가을, 한국에서 걸려온 언니의 전화는 모든 감각을 멈추게 했었다. 서둘러 달려간 한국에서 마주했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떠나신 날 이 후로 내 전화기 사진첩의 엄마 모습은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퇴근길 갓길 에 차를 세우고 들었던 그 무음의 신호음은, 역설적으로 엄마가 여전히 그곳에 계심을 알려주는 듯했다. 훗날 형제들이 모였을 때 그 일을 털어놓자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 다. 그들 역시 차마 끊지 못한 엄마의 빈방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고 했다. 비록 대답 없는 신호음으로 끝날지라도,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그 번호를 누를 것이다. 엄마가 남겨준 따뜻한 사랑과 노고는 자식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에. 매일같이 수화기를 들고, 끊어진 줄 알았던 옛 탯줄을 다시 쥐어보며, 회백색 머리칼 의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고 있다.

수필 · 2

풀섶에서 찾은 귀

김민정

시애틀의 가을비는 며칠째 창문을 두드렸다. 길게 이어지는 빗줄기는 유리창 위를 따라 선을 그리며 흘러내리다, 어느새 투명한 창살로 변해 나를 집 안에 가두었다. 창밖의 단풍잎은 바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떨어져 마당에 수북이 쌓였다. 벽난로 속 이글거리는 장작불은 나의 생각을 태우고, 불꽃 사이로 흐르는 시간은 멍하니 멈춰 있는 듯했다. 그때, ‘까톡!’ 전자음 하나가 불과 어둠의 경계를 흔들었다. 잠시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나를 누군가 불러내듯 깨웠다. “내일은 비가 그친데요. 송이버섯 따러 갈래요?” 지인이 보낸 짧은 한 줄의 메시지, 마음은 이미 숲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산의 윤곽이 여명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Gifford Pinchot National Forest, 기포드 핀쇼 국유림. 골짜기마다 가을의 숨결이 황홀한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화려함에 주눅 든 소나무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무심히 하늘만 바라보는 듯했다. 심지어 자식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송이가 자라는 비밀의 장소’에 이르자, 우리는 분주히 움직였다. AllTrails 앱을 켜고, 호루라기 신호를 정했다. 곰이 싫어한다는 쇠소리 나는 방울을 배낭에 달고, 서로 네 미터쯤 간격을 두고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 거리는 안전을 위한 간격이자,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기 위한 예의의 폭이었다. 숲은 어두운 영화관 같았다. 수직으로 솟은 소나무들이 기둥이 되고, 그 사이로 흘러드는 빛은 커튼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발아래 솔잎은 두꺼운 카펫처럼 푹신했고, 걸음마다 솔향이 피어올랐다. 그 속을 걷는 우리는 잠시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 같았다. 마침내 한 웅큼의 솔잎 무더기 아래에서 작은 봉분처럼 흙을 밀어 올린 송이를 발견 했을 때, 기쁨으로 환호를 질렀다. 쌓인 솔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상아빛 송이는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소나무, 햇빛, 비, 바람, 그리고 우리 — 그 모든 존재가 하나의 숨으로 이어져 있었다. 숲속 깊은 곳에서 막대기를 든 키가 작은 남자와 큰 바구니를 든 여자를 만났다. 그는 막대기로 땅을 ‘툭, 툭’ 두드리고 있었다. “버섯을 채취하는데 왜 막대기가 필요하죠?” 하고 물어 보았다.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딱딱한 땅은 ‘틱틱’, 송이가 숨어 있는 자리는 ‘통통’ 소리가 나지요. ”그 울림은 땅이 내는 호흡이자, 아직 피어나지 않은 생명의 신호였디.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면, 곧고 단단한 기둥이 드러난다. 갓이 완전히 펴지지 않고 단단하게 오므라든 ‘A급 송이는 아우라가 뿜어 나오는 듯 했다. 갓과 대가 만나는 경계에는 하얀 막이 여전히 붙어 있어, 마치 방금 봉인에서 풀려 난 듯한 순결함을 자랑한다. 눈에 보이는 버섯만 찾는 우리에게 그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버섯의 신’ 같았다. 문득 ‘송이(松茸)’라는 한자가 떠올랐다. ‘松’은 소나무, ‘茸’는 버섯이다. 그런데 ‘茸’ 자를 자세히 보면 **‘풀 초(艹)’ 아래에 ‘귀 이(耳)’**가 쓰여 있다. 풀 아래의 소리를 귀로 듣는 생명, 그것이 바로 버섯이었다. 아마도 고대의 채취자들도 오늘처럼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 풀 아래 숨어 있는 생명의 숨결을 귀로 들었을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 만들어졌다는 상형문자 ‘송이’에는 이미 자연의 언어를 듣는 귀가 들어 있었다. 풀 아래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귀로 들었다는 고대인들의 예리한 자연 관찰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버섯 채취자는 수많은 날의 인내 끝에 땅의 숨결과 호흡을 맞춘다. 그가 듣는 것은 단순한 울림이 아니라 생명의 떨림이다. 그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다. 어디선가 어린왕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아야 해.”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버섯 채취자는 마음의 귀를 열고 땅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송이를 찾는 일은,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과도 닮아있다. 마음으로 보기 위한 인내와 노력, 그것이 이해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는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상대의 마음을 들으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종종 자신의 생각에 갇혀, 들을 수 있으면서도 듣지 못한다. 다음 송이 산행에는 금속탐지기 대신 ‘송이 탐지기’를 단 막대기가 필요하겠다며 웃었다. 웃음은 산바람에 흩어지고, 우리는 숲이 허락한 만큼의 귀한 송이를 품고 산을 내려왔다. 물이 내려오는 계곡에서 송이를 넣고 끓인 라면은 숲이 내어준 아주 따뜻한 환대였다.. 사람들은 송이를 단순히 귀한 식재료라 여기지만, 그날 내가 느낀 귀함은 ‘깨달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법 — 눈 대신 귀로, 마음의 귀로 듣는 법. 깊은 숲 속의 한 버섯 채취자를 통해 자연이 가르쳐준 지혜였다.

수필 · 3

한강에 사과꽃이 피었다

김민정

지난달, 창밖 사과나무에 여남은 개의 열매를 남겨둔 채 수확을 마쳤다. 여름 내내 숲을 가로지르던 새들을 위한 나의 작은 배려였다. 혹여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날개들이 겨울 허기를 달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비가 멎은 오후 마당에 나서면 정적만이 고여 있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간이 침묵 속으로 흐르는 동안, 가지 끝에 매달린 사과 한 알은 지난봄 아름답게 피었던 사과꽃의 기억을 놓지 않으려 끝끝내 매달려 있었다.. 속내를 드러낸 가지들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 모습은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채, 낯선 땅의 차가운 겨울 앞에 서서 그리움 가득한 두 팔을 애틋하게 고향을 향해 뻗은 이민자의 형상과 닮아 있었다. 수십 년을 견뎌온 시간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분의 얼굴이 겹쳐진 것은 아마도 그분을 향한 그리움이 아직 내 안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은 ‘샌님’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단정한 옷매무새처럼 깔끔한외모에, 느리면서도 온화한 말투가 늘 배어 있었다. 말끝을 세우는 법이 없었고, 걸음을 옮길 때조차 주변을 먼저 살피던 분이었다. 연방 사회보장국 사무소나 병원에 가실 때 영어 통역을 도와주며 우리는 한국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가까워졌다. 초인종을 누르면 “Who is it?” 대신 언제나 “누구세요?”라는 정겨운 물음이 돌아왔다. 문턱을 넘는 순간, 시간은 거꾸로 흘러 한국의 어느 거실에 닿았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 년 세월의 손때가 묻은 한영사전과 광고까지 꼼꼼히 읽었을 듯한 한국 신문이 놓여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에는 누렇게 바랜 <목민심서>에서부터 대하소설 <토지>와 <태백산맥>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한국 문학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사과나무와 대추나무, 감나무가 어우러진 아담한 정원은 영락없이 한국의 시골집을 떠올리게 했다. 청포도 넝쿨 아래 조그만 정자를 지어 캘리포니아의 한낮 뙤약볕을 식히던 그분과 아내는, 해마다 손수 청포도 와인을 빚어 지인들에게 고향의 손맛을 선물하곤 하셨다. 거실 TV에서는 늘 한국 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귀가 어두운 아내를 위해 그분은 때론 정치 평론가가 되고, 때론 기상캐스터가 되어 고국의 소식을 중계했다. TV 화면에 한강 전경이라도 나오면 급히 아내가 앉아 있었던 휠체어를 돌려 세우며 “저기 보구려” 하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흑석동의 언덕에 사셨다고 했다. 언덕을 따라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그리고 자주 가셨던 재래시장이 그립다고 하셨다. 부부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한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민주화 시위에 나섰다가 제적을 당한 큰아들의 앞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평생 공무원이었던 그분은 쉰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 이민자가 되었다. 언어의 장벽 앞에서 그분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온전히 몸을 써야 하는 노동뿐이었다. 정원사가 되었고, 빌딩을 청소했고, 수영장의 바닥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손에 쥔 생업은 신발 수선이었다. 한때 펜을 잡던 고운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지만, 성실하고 꼼꼼한 손길 덕에 가게는 차츰 입소문을 탔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아내도 옷 수선을 거들며, 부부는 비로소 이국땅에 조심스레 뿌리를 내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운명은 가차 없었다. 노부부의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의 칼날은 아내를 지키려 몸으로 맞선 그분의 몸에 열여섯 군데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고달픈 이민의 시간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안정된 삶을 향한 꿈은 그날 산산이 무너졌다. 상처 사이로 통증만이 아니라 공포와 혼란이 스며들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서서히, ‘치매’라는 이름의 지우개가 생겼다. 마치 그날의 공포를 붙잡아 둘 수 없어, 기억이 스스로 물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하얀 도화지처럼 변해가고 있어.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만 같아..” 치매 전문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 안부를 묻는 전화선 너머로 아내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안에 노망난 사람은 없었다”는 아내의 말은 현실을 부정하는 외침이자, 혼란 속에 있는 남편의 정신을 예전처럼 돌려 놓고 싶어 하는 절규처럼 들렸다.“우리 애기 엄마 어디 갔어요?” 베개를 아기라 부르며 젊은 시절의 아내를 찾는 남편을 바라보는, 육십 년을 함께 살아온 늙은 아내의 가슴은 얼마나 깊이 무너져 갔을까. 지쳐가는 아내를 위해 어느 주말, 나는 그분을 모시고 나들이에 나섰다. 운전대를 잡고 곁눈질로 바라본 그분의 얼굴에는 타국에서 견뎌온 수십년의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주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 한강이다!” 갑자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그분이 외쳤다. 메마른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뉴 포트 도시 변두리에 흐르는 실처럼 가는 개울이었다. 개천 복개 공사가 한창인 그 초라한 물줄기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한강에 또 다리를 놓나 보네!” 치매는 그의 현재를 지워버렸지만, 고향을 향한 뼈저린 그리움만은 끝내 뺏어가지 못했다. 그 작은 실개울은 그분의 마음속에서 흑석동을 따라 흐르는 푸른 한강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분은 사과나무에서 꺾여 떨어진 가지처럼 조용히, 그러나 외롭게 먼 길을 떠나셨다. 임종의 자리에서 힘겹게 새어 나오던 숨소리는, 젊은 날 한강을 가로질러 헤엄치며 내뿜던 마지막 숨결을 떠올리게 했다. 이국의 낯선 방에서 생의 끝자락을 맞이하는 일이 어찌 그분만의 이야기이겠는가. 그것은 고국을 떠나온 우리 이민자들이 언젠가 맞닥뜨릴지도 모를, 익숙한 마지막 장면일지 모른다. 잎을 모두 떨군 채 사과 한 알을 품고 서 있는 저 나무처럼, 우리 또한 가장 소중한 그리움 하나를 가슴에 매단 채 저 깊은 잠의 강을 천천히 건너 가야 할지도 모른다. 사과 꽃이 피는 한강은 가끔 내 눈에서 흐른다. 1-5-2026

한국작가회의 미주지회 · 2026 수필 작품집 (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