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1
히망
김명주
뱃속에 바오밥나무를 심었어요
푸른 잎이 채 푸르지 않아
내장이 썩는 기다림을 지나왔어요
썩고 나면 남는 그림자를 어쩌지 못해
그냥 끌고 다녔어요
자꾸 넓어져야 하는 마음이라 해도
두근거림 하나 곁에 두고 싶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그런 표식으로
추워지는 입김에 손을 불고 나면
겨울에 손끝이 매달렸어요
푸르기도 전에 뼈처럼 남아
멀리, 그러나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도
따라왔어요
발걸음을 멈추고
맥박을 기다렸어요
귓속에 마른 씨가 굴러다녀요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어졌어요
때로 배 아픈 순간은
골라 먹고 피해 마신 것을 생각했어요
소화불량도 아닌데 소화약을 먹고
입에 쓴 좋은 약처럼
썩어가면서
배보다 커진 바오밥나무의
빈 울음을 들었어요
아니,
속 빈 바오밥나무의 갈증 같아요
마른 목소리로 목을 잠그고
또 메말라
껍질처럼 떨어지는 살갗에
매일 메아리가 흔들린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딱딱한 시간을
삭히고 있어요
시 · 2
쓰고 남은 시간
김 명주
어둠이 오는 방과 후의 운동장은 외로움의 넓이보다 넓다 지나가는 길에 가끔은 깜박거리는 불, 아직 꺼지지 않은 교실이 있다
교문은 문을 닫고 벌써 저녁을 준비중이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한다 거리에서 현기증이 난다 딸꾹질을 시작한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골목이 더 구부러진다
고속버스 창문으로 아직 지나치지 않은 침묵이 겹쳐진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단어가 두터워진다
눈으로 가라앉는 기억
침전물은 눌러앉지 않고 빈틈없는 비누 거품이 된다
살구를 깨물었다
웃통 벗은 살구의 신 핏물이 흘렀다
씹기도 전에 입안 가득 유년의 여름을 넘긴다
주먹부터 날아온 시간의 비린내는 쏙 빠진 살구씨에서 몇십 년을 뱉는다 어둠 속에서 집으로 가지 못한다
잠들지 않은 걸음 마루에 붙인다 재갈 물린 손을 조심스러워한다 문에 귀를 달고
형광등은 눈을 감는다
쓰고 남은
아직 어둠이 눕는다 넓고 넓은
시간이 잠들지 못한다
시 · 3
안부전화
김 명주
TV를 끈다
커튼 밖 소음의 틈을 비집는다
잠시
어둠의 얼굴을 켠다
맨살 웃통에서 그녀의 가슴이 지나간다
잘못 거셨습니다
우물에서 꺼낸 두레박에
엄마가 떠올랐다
긴 끈에 목소리가 매달린다
꼬인 전화선을 풀고 싶었다
그녀가 머리를 풀고 있다
뚜 —
맞춤법 흩뜨린 인사가 자라고 있다
밥은 묵고 다니제
사흘 묵은 불면이 귀찮아진다
머리에서 젖은 받침 몇 개가 떨어진다
모음은 입안에서 소리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오전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후에 소화불량 약을 먹으며
낮잠을 잔 기억
밤이 졸며 잠의 낮을 잊는다
누가 켰는지 웃음 시끄러운 밤이 소파에서 깬다
그랬을까
혹
다른 곳이 아프신 것은 아니지요
그녀의 웃음이 생각나
그렇게 웃는다
소리 없이
모음을 문 채
입을 조금 움직인다
지워버린 전화번호
오전 내내
기억이 소화되지 않았다
시 · 4
오름
새빛
경사가
높아질수록
말이 사라졌다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했다가
언제 쉬는지 알고 싶었고
나중에는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숨만 앞서고
발은 뒤따랐다
생각도
욕심도
정상도 잊고
그냥
다음 발 하나만 더
한걸음만 더
오름의 끝에는
소박한 점심
물 몇 모금
사진 몇 장
그리고
다른 한 걸음이
있었다
시 · 5
웃음꽃
송숙자
분홍 윗도리 보라색 반바지
엄마 품에 안겨
팔 다리를 흔들어,
여자 아이의 입에서
따따따 아침이 쏟아 나온다.
흰 피부에 눈, 코, 입이 맑아
더욱 아침이 밝아진다
노란 아기 오리
분홍 돼지를 안고
목소리에 안긴 세상은
엄마가 음악이다
햇살에 퍼진 웃음
털보 아저씨가 바라보고
피곤한 눈을 끌며 아줌마가 돌아본다
붕대 감은 휠체어 할머니가
바다 건너 보지 못한 손녀를 부른다
아이보다 더 시끄러운
엠알아이, 엑스레이, 씨티 스캔 걱정들
잠시 따따따
아이가 만든 햇살에 지운다
시 · 6
4월을 넘어서
송숙자 회원
나는 무덤속에 갇혀 있었다
엄마의 태에서 잠시 봤던 파란 하늘이 영겁의 땅속에서 잊혀질 즈음
태고적의 호수가
산으로
바다로
구름으로
눈물로 나에게 앉았다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
그리고 하늘이 열렸다
아픔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인가
시 · 7
변두리 창신동
류성현
서울로 이사 와 처음 살았던 동네
타향의 서러움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두 큰 절이 가깝던 산꼭대기 동네엔
가난한 서민 아파트만 즐비했었지
올라가기 힘든 비탈진 깔끄막
겨울이면 빙판 되어 썰매장이 되고
잘나고 못남 없이 목청만 크면 되던
하루하루를 힘들게 견뎌 내던 곳
동대문과 삼선교, 안암동 가는 길목
그 중간에 있어도 언제나 변두리였던 곳
그곳에서 처음으로 라면 맛을 알았고
번데기의 깊은 고소한 맛에 빠졌었지
생칼국수 파는 가게가 단골이었고
하얀 소기름이 둥둥 뜨면 마냥 행복했지
차비 아끼려 스처 지나던 양지회관 버스 정류장
파출소 앞 지날 때면 괜히 움츠러들던 날들
이제는 그 가난하고 서럽던 시절도
소년의 아련한 꿈과 추억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창신동 언덕에 남아 있네
나의 쓸쓸하고도 따뜻했던, 두 번째 고향
시 · 8
여행 후
새빛
여행 후
짐을 풀고
빨래를 정리해도
돌로미티의 바람과
베니스의 빼곡한 지붕들
아레나를 물들이던 하늘을
아직 돌려놓지 못했다
천년이 돌이 되고
이천년이 극장이 되고
삼천년의 바다가 산이되어
나를 보고 있던 곳
그 곳의 모든 것들은
시간을 아낌없이
품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길을 걸으며
시간에 쫓기던 짐을
내려 두고 왔다
시 · 9
비(悲)의 미장
센
비를 매달았습니다
걸어 놓을 고리를 찾지 못해
흘러내리는 시간이 젖습니다
투명한 우산을 든 여자를 그립니다
몸보다 우산보다 시린
거리가 치마를 다리에 감쌉니다
두뼘 처마 밑 남자를 세웁니다
담배 하나 쯤 꺼내 물면
내리는 저녁이 낮은 연기가 됩니다
눈길 서린 밖에서
흐려지는 유리창을
멀리 불이 켭니다
비를 쏟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시간을 담으려 봅니다
투명한 우산
처마를 벌써 지난 길에서
뒤집혀 뒹굴고
노란 불빛이 고개를 숙이고
깊은 속담배를 들이마십니다
번개라는 이름이 치직거리는
커피점을 모퉁이에 두었습니다
시 · 10
월요일의 사과
김경미
월요일 아침의 사과는
가장 정직한 맛이 난다
주말의 단맛이 다 빠져나간 뒤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붉은 얼굴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한 주일의 서류들이 서걱거리고
시계 바늘은 일제히
나를 향해 정렬한다
그래도 씹어야 마땅할
내 앞의 날짜들
시 · 11
안녕히
송라엘
우리는
배도 꿈도 띄우려 했다
그 사람도 그랬다
난 나를 보내며 흐른다
넌 너를 흘러 지나간다
우리는
바다에서 만나
모래까지 뒤집히는
해일 같았다
그 사람은 거기까지 흘렀다
사람이어서 그랬다
넌 너의 배를
난 나의 배를
띄운다.
시 · 12
수저
류성현
모나지 않고 둥글어
물 한 방울에도 호수가 담긴다
뜨거워도 괜찮고
차가워도 상관없다
담길 땐 흘러넘치고
비울 때엔 뿌듯하다
때로는 약사가 되고
악기도 되며
과학자가 된다
단순하게 보여도
하는 일은 참 다양하다
너로 인해 저울은 바빠져도
그냥
너무 행복해져
시 · 13
이어가는 상실
류성현
동녘이 어둠을 밀어내면
빈 몸으로 집을 나선다
꼬깃 접은 주머니 속 지폐 한 장
이리 만져 보고 참아도 보고
허기져 들이켠 막걸리 한 사발
식어 버린 가슴에 불붙였다
얽히고설킨 숨 막힌 사연
가파른 고갯길엔 힘이 부치고
한숨조차 나이를 더하니
깊어지는 주름살 동행하며
쉰 목소리는 길 끝에 머문다
갈라지는 이정표 아래
목적지를 잃어버린 긴 그림자가
제 꼬릴 잡고 길 위에 누워 있고
우듬지에 걸쳐진 띠구름
초점 없는 눈으로 멀거니 보니
빈 하루가 먼지 되어 날아간다
침묵의 여유는 살갑게 다가와
알 수 없게 매달리고 꿰어져
홀연히 그 뒤를 이어가고 있지만…
시 · 14
아내와 된장국
류성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구수한 추억들
된장국 향기 되어
그립던 어머니가 돌아왔다
희끗한 머리는 세월을 덮고
젖은 손 털어내며
앞치마로 물기 닦아내던
보고픈 어머니가 돌아왔다
도마 위에서
눈물 짜는 양파 같은
벗겨내도 속을 보이지 않는
젊은 어머니가 서 있다
보글거리는 기억과
끓어 퍼지는 향기는
밥상 위에 놓여도
집 안을 돌아다닌다
늘 같은 미소에
멀리 있던 어머니가
행주 짜는 아내 뒷모습 되어
내 곁에 돌아왔다
시 · 15
화해花蟹 (신춘문예 당선작)
하 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 화해花蟹 : 꽃게
시 · 16
바람이 누운 곳에
김명주 시인
걸음마다 어깨가 흘러내린다
지팡이는 그림자를 끌고 지척거린다
안경에 담은 웅덩이 다리 먼저 잠긴다
꼿꼿한 기억만 남아 꽃바람이라 부른다
귀가가 늦는 걸음은
바람만 가끔 서두른다
빈 골목이 오고 간다
발자국도 삼킨 창문 밖 어둠은
엄마의 조바심을 겨드랑에 끼고
졸며 밤이 휘 감긴다
생소한 이름이 타는 저녁
지붕이
아득한 아리아처럼 뜨겁게 붉다
치직거리는 시작으로
재 남은 새벽에
아버지는 연기가 된다
비스듬한 바람이 머물어
등 떠민 의자가 바퀴를 단다
어디로 갈까
아무도 찾지 않았으면 한다
시 · 17
미시건 호
송숙자
어스름녁
반달이 미시건 호에
목욕하러 왔다가
사람들이 많아
부끄러움에 물러서고 있습니다
만년전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이곳을 뎁히고
얼음이 고체에서 액체로
변했습니다
인디언들은 Mishigami라고 불렀는데 많은 물을 뜻합니다
대한민국 반의 크기입니다
바다도 아닌데
큰 항구도 넷이나 됩니다
쉬고 있는 배들이 하도 많아서
끝이 안 보여서
바다인줄 알았습니다
해빙기에
얼마만큼의 온도가 되어서야 호수가 되었을까요
우리 마음의 온도가 몇도가 되어야 미시건호 같이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요
시 · 18
타워에서
김지숙 시인
나는 너무 일찍 태어났고 너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그리고 빨리 늙어버렸다 읽어보지 않고도 이미 읽은 것 같은 책들처럼 어디로든 나를 데려다 줄 거라는 믿음 역시 언젠가 우리는 결국 서로를 잃게 될 거라는 첫 예감만큼 단단하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구름은 흐르고, 나무는 자라고, 돌은 둥글어고, 어둡고 아름다운 언어로 거짓말을 하고 꼭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던 말은 누구도 하지 않고 그런 저녁의 끝 무렵에서는 나의 감정들이 별스러울 것 없다 잊고 살겠다 싶어진다 넓고 깊은 강이 조금씩 물결을 뒤채며 흘러갔다
어디서 번져 나오는 건지 스스로 서늘해지는 어둠도 지나 언젠가는 백발이 성성한 채 낡은 의자에 앉아 구부정한 그림자 하나가 빈 벽을 건너가는 걸 보게 될 나는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을이 번져가는 강 건너 나무들이 잠시 한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았다
전망대 유리창에 빗방울이 흘렀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조금씩 닮아 있었다 우리는 제각각의 고통을 완성하기 위해 타워를 내려왔다
시작된 일은 멈출 수 없었다
시 · 19
먹먹한
김주대 시인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기 전에 알바생 어린 딸이 흘깃 쳐다보았을 진열장 속 비싼 음식 모형 나도 모르게 침 넘어가는 순간 몸에는 어느새 눈물 냄새가 번진다
시급 오천원짜리 딸이 퇴근하는 새벽까지 졸면서 책상에 앉아 돈 안되는 글을 쓰다가 아빠 뭐 해? 문자가 오면 벌떡 일어나 응 지금 돈 되는 글 쓰고 있어~ ㅎ^^,라고 답을 보냈다 키가 훌쩍 커버린 아픈 막내는 가족이 모두 일하러 간 사이 화장실 옆에 걸레처럼 길게 몸을 뉘어놓고 구토가 날 때마다 어린 고독을 울컥울컥 쏟아낸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탈모증을 좀 잘 가리고 예쁘게만 보여 맛있는 것 무사히 얻어먹기를 솔직하게 빈다 그래서 나는 이 집안의 애비다 젊은 날의 사랑으로 목숨을 떼어 만든 저것들이 다 클 때 까지는 살기 싫어도 살아 있어야 한다 혈액처럼 몸속에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눈두덩이 눈물 같은 걸 올려놓지는 말아야 한다
아가리로 울면서 아가리로 밥을 처넣는 게 인생이라면 김밥이든 라면이든 밀어넣어 올라오는 울음을 틀어막고 농담처럼 또 쓰윽 웃는 거다 내려가는 밥과 올라오는 눈물을 울대뼈쯤에서 충돌시킬 때마다 신의 잔인한 의지를 먹먹하게 목구멍으로 느끼는 나는 이 집안의 강한 애비다
시 · 20
上弦
나희덕 시인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다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시 · 21
저것은 벽
도종환 시인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 · 22
똥통같은 세상
송경동 시인
나이 먹으며 알게 된 것은
내가 높은 꿈보다 낮은 똥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쯤 내 똥이
얼마나 무르익어 어느 선까지 내려와 있는지
아는 것이다 어려서는 며칠에 한번씩 싸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날마다 먹은 만큼은 똥을 싸는 게
건강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크게 배설하는 일보다 조그만 변기 위에 앉아
힘주어 굵은 똥 싸는 일이 그나마
세상을 위해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것들보다 그 위대한 것들이 싸놓은
똥을 연구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 진솔할 것이다
먹은 만큼도 싸지 못하는 불구의 기계들이
어딘가 얹혀 세계를 병들게 하는
이 똥통 같은 세상에서
당신이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나는 검게 그을린 똥을 구웠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철학을 했다면
나는 똥을 했다고 할 것이다
시 · 23
빈 하루
류성현
어둠이 깨어나면
빈 수레 끌고 집을 나서고
허기져 들이켠 한 사발 막걸리에
차갑던 기운에 불을 붙인다
얽히고설킨 길 위 발자국들
고갯길에는 힘이 부쳐 숨 고르고
한숨도 나이가 드니
횟수만 늘어나
시커먼 얼굴 주름살 패고
목소리조차 휑하게 맴돈다
갈라져 뱉어진 한숨 같은 이정표에
목적지도 알 수 없는 긴 그림자가
제 꼬리 잡고 길 위에 누워 있고
우듬지에 걸쳐 있는 종이학 구름을
멀거니 쳐다보는 눈빛에
상실한 하루는 먼지만 날린다
시 · 24
6월
우성숙
6월은 여름의 문턱에 서 있는 시간이다.
아직 한여름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전, 햇빛은 부드럽고 공기는 아직 숨을 고르고 있다.
초록은 가장 짙어지고, 오래 기다려 온 것들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겨울 동안 비어 있던 텃밭에는 상추가 자라나고, 매일 저녁 직접 따서 식탁에 올리는 작은 기쁨이 일상이 된다.
계절은 이미 여름을 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아직 머무름의 시간이 함께 있다.
이곳 6월은 아직은 조금 춥다. 따뜻해지려다 말고, 바람 끝에 아직 겨울의 기척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 · 25
모란유월
새빛
한해가 반으로
동강
잘려 나가려니
모란이
끝내
꽃을 터트렸다
제 화려함이
버거웠던가
하룻밤 비에
풀썩
주저 앉았다
그토록
질 걸 알면서도
저토록 피어나야
그래야
꽃인가 보다
시 · 26
유월의 어느날
정효순
햇살은 조금 더 깊어지고
바람은 조금 더 부드러워진다
살아온 날들의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절은 묵묵히 찾아와
나의 어깨 위에
너의 어깨위에
푸른 위로를 내려놓는다
오늘도 잘 살아냈다고
꽃보다 짙은
초록의 시간으로 가자고…
시 · 27
6월의 어느날
류유니
6 월의 어느 날
나는 늦은 깨 모종을 심었다.
다른 해 보다 모종 크기가 작았다.
땅을 파고 물을 주고 거름을 붓고
또 물을 주고 심었다
잘 크기를 바라며
그 깻잎이 자라면 우리 밥상에
그리고 옆집 밥상에 오르겠지
사랑을 나누며
시 · 28
파주에 닿지 않은 말
김명주
파주 못 미치는 기차를 타고
입 다물고 간다
구파발 지나 칸마다 자리가 혼자 앉는다
실 꿰지 않는 바늘을 판다
천원에 두개
눈 감고 바느질 침침한 밤을 잇는다
내일은 이틀이 하루가 되듯 길어
이천원 내민 여자의 주름이 먼저 묻는다
역 하나 채 지나는 동안
실 하나 사지 않은 당신은 전화기에서
떠나지 못한다
노란 종이 까만 글씨가 굵게 프린트된
무릎이 기어간다
잘린 팔 하나로 도움을 들이내민다
반소매 나와 끊긴 맨살
허우적거리며 날아다닌다
두 정거장 겨우 지나
눈 대신 더듬는 지팡이 한 손
때 젖은 플라스틱 바구니 든
바람이 숨을 막는다
눈길 따라붙지 않는 걸음이
다음 칸으로 지나가도록
언덕 너머 둔 눈이
가슴에서 굴러다닌다
역 마다
타래같은 시선이 풀어가고
어깨가 전화속으로 사라진다
벌써
파주에 못 닿은 대화
얼굴만 쓰다듬고 있다
시 · 29
똥무더기가 사랑스런 이유
송숙자
울타리 밖
취나물 자랄때마다 누군가의 간식이 되어
뒷뜰로 옮겼다
쌉쌀한 이파리가 자라고
그 위로 어화둥둥
노부부가 입맛 다시며 지난다
친구 지인의 얼굴이 떠 있고
달팽이도 신이 났다
6월의 어느날
뒷문은 열려 하품하고
취밭엔
동글동글 똥무더기 여러채 쌓여있다
이파리는 간 곳 없고
줄기만 서 있는데
가만히 그것을 살펴보니
취, 수국, 아욱, 백합, 레즈베리, 도라지 꽃대까지 뭉쳐 있다
새벽이 안개속에 꾸물거리고 있는데
엄마사슴이
네발로 간신히 서 있는
아기 흰 점백이를 데리고 와 문안한다
마음에 장미꽃이 환하게 핀다.
시 · 30
무지개
류성현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울더니
한바탕 소나기를 퍼붓고 난 뒤
고운 빛깔 머금고
살포시 고개 내밀어
환한 미소 짓다가
어느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짧았던 그 만남에
희망은 너를 찾고
꿈은 너를 좇는데
기억이
다시 마음을 흔들고
그리움이 깊어갈 때
나는 또
너를 기다린다.
시 · 31
내가 보인다, 네가 보인다…
정효순
세상은 하얗게 침묵으로 덮어진다
불빛 아래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돌아가지 못한 편지들처럼
허공을 맴돈다
창문에 맺힌 성에 너머로
나는 오래전 떠나온 산과
어머니의 부엌 불빛을 더듬는다…
익숙하지 않은 말들 사이에서
나를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어제가 되어간다
그 시간 끝에서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난다
거리의 불빛 속에 서 있는
한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바로 나였고
바라보니
그가 바로 너였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우리의 사연처럼 쌓여
하얀 세상을 이루듯
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눈물은 나의 눈물이 된다
멀리 떠나왔어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이 내리는 깊은 밤
창밖의 하얀 적막 속에서
나는 본다
내가 보인다
그리고,
네가 보인다…
시 · 32
6월의 어느 날
김명주
창문을 두드립니다
기척 없는 이르고 이른 아침
잊을 만 소리가 들립니다
의자에서 귀를 열어봅니다
바람이 부딪는 것일까요
마중 못하고 떠나보낸
5월이 돌아온 것일까요
거울에 비친 모습은
미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늘어진 주름이 너그럽지 않고
굵어간 허리가 욕심처럼 보입니다
울음도 가끔 아름다운
제 것을 놓기 싫어
자신을 향해 쪼아 대는
그림자입니다
시 · 33
6월
우성숙
6월은 여름의 문턱에 서 있는 시간이다.
아직 한여름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전, 햇빛은 부드럽고 공기는 아직 숨을 고르고 있다.
초록은 가장 짙어지고, 오래 기다려 온 것들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겨울 동안 비어 있던 텃밭에는 상추가 자라나고, 매일 저녁 직접 따서 식탁에 올리는 작은 기쁨이 일상이 된다.
계절은 이미 여름을 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아직 머무름의 시간이 함께 있다.
이곳 6월은 아직은 조금 춥다. 따뜻해지려다 말고, 바람 끝에 아직 겨울의 기척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